문충공

문충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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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약천년보(藥泉年譜)의 대략(大略)

   약천손자(藥泉孫) 되시는 오관(五寬)께서 편찬(編)하신 것을 발췌하여 쓴다.

一세(齡)  조선(朝鮮) 인조(仁祖) 七년 기사(己巳―서기 一六二九년) 十二月 三日 충주(忠州) 누암(樓巖) 외가댁(外家宅―安東權氏)에서 출생(生)하시고 결성 구산(結城龜山―현(現) 충남 홍성군 결성면 용와리(忠南洪城郡結城面龍臥里))에서 성장하시다.이곳은 공이 출생하시기 一년 전에 조부(祖) 평강공(平康公)께서 퇴관하신 후에 전로귀양지(田盧歸養地―노후에 거처하실 시골집)로 결정하셔서 이사하신 곳이다.

二十세   장가드시다.(結婚)

二三세   효종(孝宗) 二년(一六五一년) 七월에 진사(進士).

二八세   효종(孝宗) 七년 八월 별시(別試)에 급제(及第) 동년 十一月 가주서(假注書) 동년 十二月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六品).

二九세   세자시강원주서(世子侍講院注書)

三一세   四月 전라우도십삼읍암행어사(全羅右道十三邑暗行御史) 五月 효종(孝宗) 승하(돌아가심).

三四세   임인(壬寅―一六六二년 현종(顯宗) 三年) 경상도진휼어사(慶尙道賑恤御史―백성을 잘 구호(救護)하고 어루만지는 어사)

三九세   승지(承旨)

四三세   함경도관찰사(咸鏡道觀察使)

四五세   국방(國防)에 필요한 갑산(甲山) 길주(吉州) 사이에 새 길(道)을 만들다.

四六세   七月 함흥성(咸興城)을 개축(改築).八月 현종(顯宗) 승하(昇遐―돌아가심).九月 병조참판(兵曹參判) 이조참판(吏曹參判).

五十세   숙종(肅宗) 四년(一六七八년) 형조판서(刑曹判書).

五一세   三月 허적(許積―남인(南人))의 참소(讒訴)로 처음에는 거제(巨濟)로 귀향(流配)가셨다가 나중에 남해(南海)로 옮기다.十月 특별사면(特放).

五二세   숙종(肅宗) 六년(一六八○년) 四월 행도승지(行都承旨).

※행(行)―품계가 높은 분이 낮은 벼슬에 나감.

수(守)―품계가 낮은 분이 높은 벼슬에 나가는 것.

홍문관대제학(弘文館大提學)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 겸(兼)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 겸(兼) 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五月 토역(討逆)―복선군(福善君)을 임금으로 추대하려는 역적들을 토벌하였다.이 공로(功)로 사원종훈일등(社原從勳一等)을 받다.

五四세   七月 행대사간(行大司諫).八月 병조판서(兵曹判書).

五五세   四月 겸(兼) 대제학(大提學)―一六八三년

五六세   갑자(甲子) 숙종(肅宗) 十년(一六八四년) 一月 우의정(右議政)이 되셨으나 고사(固辭―사양)하시다가 부득이 나아가시다.十二月 사신(使臣)으로 연경(燕京―중국 서울)에 도착하시다.

五七세   二月에 돌아오시다.(復路) 五月에 좌의정(左議政)이 되시다.三十一회나 사양하는 글을 임금님께 올려서 十月에 허락을 받다.(三十一辭,許) 十二月에 다시 좌의정을 제수받다.(復拜左議政)

五九세   영의정(領議政)에 오르시다.숙종(肅宗) 十三년 정묘(丁卯―一六八七년) 三月부터 四十六차례나 임금께 사양하는 글을 올렸으나 도리어 이 자리에 오르시게 되다.

六十세   세자(世子―다음 대에 임금이 될 분)를 책봉(冊封)하는 문제에 있어 논란(論難―서인(西人)과 남인(南人) 사이에)으로 축출당한 이조판서(吏曹判書) 박세채(朴世采)를 바르게 구하고저(匡救)하다가 八月에 경흥(慶興)으로 유배(流配)되시다.―남인(南人)의 모해로―十二月에 풀려 돌아오시다.

◎서인(西人)이 후(後)에 노소론(老少論)으로 갈라서게 된다.

六一세   一月 행중추부사(行中樞府事) 파담(琶潭)으로 돌아오시다.―숙종(肅宗) 十五年 서기 一六八九年 二月―

◎이때 전후에 서울댁에서(京第) 파담으로 낙향(落鄕)하여 옮기신듯.(서울댁도 있었으나) 四月 강릉(江陵)으로 귀양가시다.(江陵中途付處)―중궁(中宮―숙종의 비 인현왕후)의 폐출(廢黜)되는 것을 부당하다고 간(諫)하시다가 끝내 중궁은 폐출되고 약천께서도 귀양 가게 되시다.―

六二세   풀려서 五月에 파담으로 돌아오시다.―경오(庚午,서기 一六九○년)

◎ 이때에 지으신 시(詩―약천집 중에서)가 있다.

東遷關外隔年歸  五月琶潭花事非  最是多情倭억알  枝頭殘片尙依依

六三세   결성(結城)댁으로 가시다.대토혈을 하시다.(大吐血)

六四세   숙종(肅宗) 十八년(一六九二년) 문인(門人―제자) 강성복(姜聖復)이 영당(影堂―영정을 뫼셔두는 집)을 세우고 화사(畵師―그림 그리는 사람) 변량(卞亮)이 영정(影幀―실물과 똑같이 사람 얼굴을 그린 것) 二본(本)을 그리다.十八년 후 제자(門人) 최석정(崔錫鼎)―약천 이후에 영의정을 七번이나 거듭 지낸 유명한 분이다―이 영정 一본을 만들어 뫼시다.(지금 별묘(別廟)에 뫼신 것)

六六세   숙종(肅宗) 二十년 갑술(甲戌―一六九四년) 四月 영의정(領議政) 특배(特拜)―두 번째이다.―중궁(中宮―인현왕후 민씨) 복위(復位).이때 우의정은 박세채(朴世采) 좌의정은 윤지완(尹趾完)이었다.

六七세   수십 차 영의정을 고사하는 글을 임금께 올리다.(固辭數十次) 七月에 영상 자리를 물러나서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로 계시다.十月에 다시 영의정(領相)이 되시다.―세 번째―수십 차 사양하는 글을 임금께 올리다.(疏)

六八세   임금이 친히 악수를 하시면서 만류하시고(親握手挽留) 서울댁에 계시게 하셨다.(留京第)

七十세   치사(致仕)를 청하였으나 임금은 윤허(允許)치 않으셨다.(乞致仕不許)

七四세   숙종(肅宗) 二十八년(一七二○년) 五月 노론(老論)의 모해로 아산으로 귀양가시다.(牙山中途付處) 十一月에 특명으로 풀려 돌아오시다.(特命放歸)

七七세   다시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로 계시다.

七九세   숙종(肅宗) 三十三年 정해(丁亥―一七○七년) 그동안에 여러 번 벼슬에서 물러나게 하여 주십사고 임금님께 상소(上疏)하셨던바 드디어 치사(致仕)를 허락받고(乞致仕許) 봉조하(奉朝賀)가 되시다.

八十세   나라에서 주는 녹(祿)과 다달이 내리는 술과 고기를 안받겠다고 사양하였으나 임금은 이를 허락치 않았다.(不受祿月致酒肉不許)

八三세   숙종(肅宗) 三十七년 신묘(辛卯―一七一一년) 三月 十七日 병환이 나셔서 파담(琶潭)으로 돌아오시는 길에 광주 율현에서 하세하시다.(涉次廣州栗峴卒) 임금(肅宗)은 관재를 내리고(賜棺材) 三년동안 녹(祿)을 내렸으며 五月 二日 양주땅 충경공 산소 오른쪽 언덕에 나라에서 예장 뫼시고(禮葬于楊州賜洞忠景公墓右岡―西麓) 양궁(兩宮―임금 내외분)에서는 관리를 보내어 제사지내드렸다.(兩宮遣官致祭)

十年後   경종(景宗) 一년 신축(辛丑―一七二一년) 三月 二十一日에 용인 모현 초부리(龍仁慕賢草芙里―부기울) 대화산 부인 정씨(東萊鄭氏) 묘소에 합장(合葬于太華山)이시다.(깖右)―墓左―

경종(景宗) 二년 八월 문충공의 시호를 내리고(賜諡文忠) 숙종 묘정에 배향뫼시다.(配享于肅宗廟庭)

경종(景宗) 三년 가을(秋) 문집(文集―약천집(藥泉集)) 三十四권(卷) 十七책(冊)이 나오다.(文集三十四卷行于世) 나라에서 간행(刊行)함.―숙종 四十년 임금이 국구(國舅―임금의 장인) 김주신(金柱臣)에게 명하였음.

◎ 약천년보의 원본(原本)은 약천 셋째 손자 오관(五寬)―큰손자 극관(克寬)께서 무후(無后)되셔서 이분 큰아드님이 양자(養子) 되셨다.―께서 편찬하신 것으로 四권이며 연전에 그동안 죄송하게도 어디로 돌고 돌아 어느 고책점에 있는 것을 발견 구입하였다.어느분의 글씨인지는 모르나 육필로 두서너 분의 글씨로 썼으며 사적과 사연이 많으나 여기 모두 옮길수 없어 극히 대략만을 여기 쓴다.(編者註)

 

 

◎ 해석과 참고(解釋及參考)

치사(致仕)―나이가 많아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나는 일.조선 때는 당상관(堂上官)으로 치사하는 경우에 예조(禮曹)에서 매달 고기와 술을 급여하였으며 국가의 중대한 정사로 인하여 치사하지 못하는 七十세 이상된 일품(一品)관에게는 궤(짙―몸을 기대는 안석)와 장(杖―지팡이)을 하사하였다.늙은 관리가 임금께 청하여 물러날 것을 허락받고 물러나는 것이다.고관(高官)에 해당하는 자는 드물다.(國史大觀에서)

봉조하(奉朝賀)―조선 예종(睿宗) 一년(一四六九년)부터 시작된 제도(制度)인데 종이품(從二品) 이상의 퇴임한 전직 관원에게 공로(功)에 의하여 이 칭호(稱號)를 주어서 종신(終身)토록 그전 품계(品階)에 해당하는 국록(國祿―보수)을 받게 하고 실무는 안하되 국가의 의식이 있을 때는 조복(朝服)을 입고 참례(參禮)하였다.원래는 十五명을 정원(定員)으로 했었으나 그후에는 적당한 수로 변경 실시하였다.(國史大觀에서)

약천집(藥泉集)―약천께서 남기신 여러 가지 글들을 모아서 그중에서 골라서 책 三十四권(卷) 十七책(冊)으로 철자로 간행(綴字印刊行)한 책이다.하세하신 지 四년 후에 숙종(肅宗) 四十년에 임금은 그의 장인(國舅) 김주신(金柱臣)에게 그 수집(蒐集) 간행(刊行)을 하교(下敎)하면서 약천집(藥泉集)이라 쓴 친필(親筆)을 내렸다.―약천집 첫째 권에 그 사본을 편입했다.―그후 경종(景宗) 三년이 되어서야 완성되어 三○○부를 나라에서 인쇄해내었다.※근자에 어느 서점에서 영인본(影印本)을 냈다.

오달제(吳達濟)―약천 고모부(姑母夫).병자호란 당시 인조(仁祖)의 항복을 몸으로 막으려했던 충신(忠臣) 삼학사(三學士)의 한 분.청(淸)으로 끌려가 끝내 항복을 아니함으로 죽음을 당하였다.호(號) 추담(秋潭).

서계(西溪) 박세당(朴世堂)―호(號)가 서계(西溪)이신데 약천 매부(姉兄)이시고 학자(學者)이시며 재상(宰相)을 지내신 분이다.

동춘(同春) 송준길(宋浚吉)―호(號)가 동춘(同春)이신데 약천께서 사사(師事―선생님으로 섬김)이시다.김성공(金城公―약천 아버님)의 묘지(墓誌)를 쓰신 분이며 판서(判書)를 지내시고 유명한 학자(學者)로 문묘배향(文廟配享)이 되시다.

경제(京第―서울집)―서울댁은 인조(仁祖) 을축년(乙丑年―약천이 나시기 四년 전,一六二五년)에 조부(祖) 평강공(平康公)께서 정릉 소동(貞陵小洞―지금의 정동)에 사셨는데 그 五十五년 후인 숙종(肅宗) 경신년(庚申年―一六八○년)에 나라에서 인빈(仁嬪)의 사당(祠堂)으로 사들임에 목멱산하(木覓山下―지금의 남산 밑) 명례방(明禮坊)으로 이사하였다.

조선조(朝鮮朝)를 통하여 대제학(大提學)―학문의 최고―과 영의정(領議政)―정치의 최고 관직(官職)―을 다 지내신 분은 六人 밖에 안계신다 한다.약천께서는 一六八三년에 대제학(大提學)을 一六八七년에 영의정(領議政)―세 번이나 다시 되시다―이 되신 분으로 이런 점에서 후세에 칭송을 더 받는 분이시다.또 당시 치열한 당쟁(黨爭) 시국에서 고생도 하셨으나 대과없이 지내신 분으로도 그러하다.반대당이었던 노론(老論)측에서도 후세에‘그분만은……’이라는 칭송도 있다 한다.

하세(下世)하신 후 당초에 부인 산소에 합장 뫼시지않고 양주 충경공 산소 서쪽 언덕에 예장(禮葬)드렸던 것은 당시 당파싸움으로 사후에라도 잘못되는 일이 있던 예(例)가 있어 사후(死後)에 묘(墓)를 파내서 형벌주는 등사가 있었던 터임으로 우선 따로 장사 뫼시고(權葬―一時葬) 시일이 경과한 후를 보자는 데서 유언(遺言)이 계셨음으로 그렇게 하신 것으로 알며(以訟故遺令權葬五月遂禮葬于賜洞) 결국 아무 일 없이 十여년을 지낸 후에 지금 산소로 이장 합폄한 것은 그 험악한 시기에 무사히 종신(終身)하셨고 그 후에도 별일 없으셨다는 것으로이분의 불편처세(不扁處世)와 강직(剛直) 지공무사(至公無私)의 결과라 할 것이며 또 그 정치역량(政治力量) 등을 엿볼 수 있다 할 것으로 칭송되신다.

주(註) 권(權)‥뜻 一,始也 二,一時也 三,假也(大辭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