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보(族譜)의 연혁
우리 족보(族譜)의 연혁(沿革―내려온 과정)
우리 남씨보첩(南氏譜牒)은 옛날 영양파(英陽派) 자손인 남사고(南師古)께서 시작하신 것이라고 하는 영양보(英陽譜)와 우리 의령보(宜寧譜)가 전하여 내려왔다 하는데 의령파족보(宜寧譜)는
가, 선(銑―직제학 七대손,판서)께서 손질하기 시작하셨다 하며,숙종(肅宗) 十九년에 시작하여 여러 해 만에 족보(族譜)의 형태(形態)를 완성하고 익훈(益薰―충간공 九대손)께서 함경감사(咸鏡監司)로 계실 때 간행(刊行)했다하는데 여러분이 이에 관여하신 중에 약천(藥泉)께서 정축(丁丑―서기 一六九七년) 八월에 서문(序文)을 쓰셨다.
나, 계유보(癸酉譜)‥전해 내려오던 것을 서기 一六九三년
다, 무인보(戊寅譜)‥무인(戊寅―조선(朝鮮) 영조(英祖) 二十五~三十四年)년에 발간(發刊).八권 재판.
라, 갑자보(甲子譜)‥순조(純祖) 四년 갑자(甲子)에 무인보(戊寅譜)를 十四권으로 중간(重刊).
마, 기사보(己巳譜)‥五년 후에 다시 만들었는데 여기에는 유용(有容―직제학 十二대손,판서,금능 상공의 부친)께서 무인(戊寅)년에,공철(公轍―금능 상공 유용의 아드님,영상)께서 기사(己巳)년 봄에,상선(相善―직제학파,승지)께서 경오(庚午―一八七○)년에,각각 서문(序文)을 쓰셨다.족보 二十三권과 병록(倂錄) 一권을 발간하였고,구정유고(龜亭遺藁) 一권과 남씨 선록(南氏述先錄) 등도 만들었다.
바, 경자보(庚子譜)‥三十一년 후 경자(庚子―서기 一九○○,광무 四년)년에 일부 완공이 되었는듯,통칭 경자보.명선(明善―직제학파,한성판윤),정철(廷哲―충간공파,판서)께서 각각 서문(序文)을 쓰셨다.
사, 병인보(丙寅譜)‥서기 一九二六년 병인(丙寅)에 발간,규희(奎熙―직제학파,판서) 서문(序文)을 씀.(미완성(未完成))
아, 정유대동보(丁酉大同譜)‥삼관남씨대종회(三貫南氏大宗會)에서 삼관남씨족보를 한데 묶어서 서기 一九五七년 정유(丁酉)에 발간,상계(上系)에 틀린 것이 있다.
자, 기미대동보(己未大同譜)‥서기 一九七九년 기미(己未)에 저번 것을 잘 고치지 못하고 더러는 새것을 넣어서 사(四)권을 한 질로 하여 발간했는데 부족한 점이 있고 우리 약천파(藥泉派) 부분에도 무리한 삽입(揷入)이 있어서 유감된 바 있다.
※ 약천문충공파보(藥泉文忠公派譜)‥이번 우리 파계보를 위주로 만들었다.대동보(大同譜)에 새로 넣어진 부분은 그 부분을 같이 써넣었으되 표시를 따로한바,이는 그 정확한 사연들을 차후에라도 차졌으면 하는 까닭이다.단지 정유보(丁酉譜)에 삽입한 부분은 상태(相泰―학성(鶴聲) 八代孫으로 건원(建源) 후손(後孫))가 약천문중에 논의하여 시행한 것이나 기미보(己未譜)에 또 삽입한 부분은 본 종중과 논의한한바 없는 것으로서 그 경위를 상세히 알 수 없다.
의령남씨족보 발간 연대표(宜寧南氏族譜發刊年代表)
일부 참고(參考)
一, 숙종(肅宗) 十九年(一六九三) 계유(癸酉)에 밀직공(密直公) 十六세손(世孫)이요,경상감사(慶尙監司) 호(號) 창명(滄溟)公의 자(子)인 참판(參判) 익훈(益熏)이 함경감사(咸鏡監司)로 전임(轉任)한 후(後)로도 계속(繼續) 전념(專念) 수보(修譜)하여 의령남씨족보(宜寧南氏族譜) 二권(卷)을 숙종(肅宗) 二十三年(一六九七) 정축(丁丑)에 편찬창간(編纂創刊)하였다.의령남씨족보(宜寧南氏族譜)는 명종년간(明宗年間―一五五○年頃)에 초보(草譜)가 작성(作成)되었다는 적실(的實)한 증빙(證憑)은 없되,상기(上記)한 족보(族譜)에 발재(發梓)된 호(號) 약천(藥泉) 영의정(領議政) 구만상공(九萬相公)의 서문(序文)을 보더라도 그 보단 오래된 석일(昔日)에 족보(族譜)가 있었음을 인식(認識)할 수 있으니 동서문(同序文)의 일절(一節)을 전재(轉載)하면 운(云)하되‘유구신이보(有舊新二譜)이나 연대요원(年代遙遠)하고 기재심소(記載甚疎)하므로 판서(判書) 선(銑)이 부취수정(뙤聚修正)하였으나 역다미비(亦多未備)하여 경자(頃者)에 고참판(故는判) 익훈(益熏)이 방문제종(訪問諸宗)하고 첨가성취(添加成就) 등목광인(登木廣印)하여 영견족인(領遣族人)이라’운운(云云)하였다.그후 六十一년을 지나서,
二, 영종(英宗) 三十四年(一七五八) 무인(戊寅)에 의령남씨족보(宜寧南氏族譜) 八권(卷)을 재판(再版)하였다.그후 四十六年을 지나서,
三, 순종(純宗) 四年(一八○四) 갑자(甲子)에 동상(同上) 족보(族譜) 十四권(卷)을 중간(重刊)하였다.그후
四, 헌종(憲宗) 五年(一八四○) 경자(庚子)에 이조판서(吏曹判書) 시(諡) 문정(文貞) 호(號) 규재공(圭齎公) 병철(秉哲)이 수보(修譜)하다가 이십여년(二十餘年)에 미필(未畢)하고 계씨(季氏) 이조판서(吏曹判書) 시(諡) 문청(文淸) 호(號) 혜천공(惠泉公) 상길(相吉)이 인수(引受)하였으나 역(亦) 미필(未畢)하고 그후 승지공(承旨公) 상선(相善)이 고종(高宗) 七年(一八七○) 경오(庚午)에 동족보(同族譜) 二十三권(卷)과 변록(뒝錄) 一권(卷)을 발간(發刊)하였다.이외에도 구정공유고(龜亭公遺藁) 一권(卷) 남씨술선록(南氏述先錄) 등(等)의 여러 서책(書冊)이 있음.전보출간후(前譜出刊後) 六十六年이 되던 때다.그후 五十年을 지나서,
五, 광복전(光復前) 一九二○年 경신(庚申)에 문장(門長) 위채(緯采),도유사(都有司) 규희(奎熙) 유사(有司) 태희(台熙) 정길(廷吉),장희(張熙) 등(等) 제씨(諸氏)의 협의(協議)로 수보추진중(修譜推進中)이다가 미필(未畢)하였다.경오년후(庚午年後) 八十七年이 지나서 서기(西紀) 一九五七年 정유(丁酉)에 지(至)하다,
六, 광복후(光復後) 一九五五年 을미(乙未)에 삼관남씨대종회장(三貫南氏大宗會長) 호(號) 우하(又何) 상철(相喆)의 제의(提議)로 연삼년간(連三年間) 단자(單子)를 수집정리(蒐集整理)한 후 一九五七年 정유(丁酉)에 남씨대동보(南氏大同譜) 二十二권(卷)을 편찬발간(編纂發刊)하였다.
七, 一九七四年 갑인(甲寅)에 二十세기(世紀) 종언사업(終焉事業)으로 남씨대동보(南氏大同譜) 재차(再次) 편찬(編纂) 의결(議決)하여 一九七八年 무오(戊午) 현재(現在) 정단중(正單中).※이 표는 직제학분파(直提學分派)의 것을 참고로 첨부한 것인데 광복후(光復後) 두 차례 발간된 대동보(大同譜―삼관남씨 전부를 수록한 것)는 내용에 미비한 부분이 너무 많아서 일부 물의가 있는 터이며 이 표 첨부로 우리 족보 발간의 역사를 좀 더 자세히 알게 될듯해서이다.
우리 족보(族譜)의 유래(由來)
모성(某姓)을 막론하고 어느 성이나 신라(新羅) 고려(高麗) 때에는 족보(族譜)가 없었다 하며 우리역시,전해내려오는 문헌(文獻)이 별로 없고 조선(朝鮮)시대부터 시작되었다고 보는 것이다.남씨(南氏) 족보는 영양보(英陽譜) 의령보(宜寧譜) 고성보(固城譜)가 각기 있는데 그 내용에 다른 부분이 있어 선대(先代) 부분에 맞지 않은 것이 있던 까닭에 옛부터 특히 영양보(英陽譜) 내용에 거짓이 있다하여 말이 있었고 약천(藥泉)께서 쓰신그당시 발간(發刊) 족보 서문(序文)에도 밀직공(密直公) 전대(前代) 부분에,의심스러움이 있다 하셨는데 조선(朝鮮) 영조(英祖) 때에는 휘(諱) 태제(泰齊) 유용(有容) 등 고관(高官) 십여 인이 같이 쓰신 영양남씨 위계변(英陽南氏僞系辨)이라는 책자(冊子)를 남기신 일이 있고하여 삼관남씨합보(三貫南氏合譜)는 시조(始祖) 한 분의 자손이니 의당(宜當) 그리되어야 할 것이었으나 도저히 생각지도 못하였던 것이다.
이리하여 우리 의령보(宜寧譜)는 따로 계유보(癸酉譜―조선 숙종 十九年)를 위시하여 서기 一六九三年 무인(戊寅),갑자(甲子),기사(己巳),경오(庚午―一八七○년),경자(庚子―一九○○年),경신(庚申―一九二○년)에각각 만들어졌었고(미완성) 근자에 삼관남씨대종회(三貫南氏大宗會)를 구성(構成)하여 그 주관(主官)으로 무리를 무릅쓰고 삼관남씨대동보(三貫南氏大宗會)를 두 차례(서기 一九五七年 정유(丁酉)와 一九七九년 기미(己未)) 발간(發刊)하였는데 옛부터 서로 다르고 틀리는 부분 즉(卽),시조공(始祖公)부터 홍보(洪甫) 군보(君甫) 광보(匡甫) 삼형제(三兄弟)분까지의 약 五백년간의 계보(系譜)를 삭략(削略)하고 그 후대(後代)에도 영양보(英陽譜)를 본따서 상계(上系)와 하계(下系)를 거꾸로 뫼시는 망발된 점도 있다하여 물의(物議)가 많다.
선대(先代)에대한 정확성(正確性)에 의심의 여지를 그냥 남겨둔채 또 오자(誤字) 낙자(落字),중간삽입(中間揷入)의 불비(不備) 등등이 있었음은 취급소홀이라고 할 것이며 우리 약천파(藥泉派)에 새로 입보(入譜)된 부분도 있는데 그 원인이 불분명(不分明)한 것이 없지않다.
이에 이 파보(派譜)는 전부터 내려오는 의령보(宜寧譜)를 중심 기본으로 좀 자세히 쓰기로 하였다.